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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밑성형 |
작성일 |
26-10-11 1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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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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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피민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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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는 3성(城)과 3평(平)이 있다. 지명의 유사성에 따른 과잉 일반화 혹은 인지 오류일 수 있겠지만, 기질이 곧고 의(義)로움이 넘치는 고을을 맞춤형으로 부르는 말이다. 3성은 곡성·보성·장성인데, 비교적 산지가 많고 험준한 탓에 기세가 굳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영산강 수계 퇴적지형을 배경으로 형성된 남평·창평·함평이 3평이다. 들이 넓고 기름진 땅이었으니 권력자들의 숱한 수탈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자연히 부정과 불의에 맞서는 의로움과 저항 의식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특히 개항 이후 일제강.기를 전후에는 외세의 침략까지 더해져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항일 운동의 거.이 되었던 곳이다. 인간이 나고 자란 환경은 그 지역 주민들의 의식과 성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 모양이다. 그러기에 남도는 온통 미곡 산지였으니, 차이는 있을지라도 의향, 예향 아닌 곳이 어디 있을까.
남평은 백제 때에는 무진군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통일 신라 시대에는 현웅현(玄雄縣)으로 불리던 고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남평 또는 영평(永平)으로 혼용하여 부르다가,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감무를 설치했다가 태종 13년(1413년)에 현감이 파견되는 것을 계기로 남평이 고유 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고종 32년(1895년)에 나주부에 속한 남평군으로 승격되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는 나주군에 병합되어 남평면이 되었다. 미동부리, 현웅, 영평의 어원을 살펴보면, 비록 한자화되었지만, 물이 풍부한, 넓은 들이 전개된 평야 지역이라는 의미가 지명에 담겨 있다.
안성현 노래비
#드들강 노래
남평 동사리에서 태어나서 교사로,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1950년 월북했던 안성현(安聖鉉, 1920~2006)은 남평공립보통학교(남평초등학교) 21회 졸업생이다. 그가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에는 드들강의 서정이 잘 담겨 있다. 이 곡은 1922년 발표한 김소월의 시를 바탕으로 1948년 무렵 그가 광주 수기동에 살던 시절에 작곡한 것이다. 따라서 가사에 등장하는 '뜰에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 갈잎의 노래'는 김소월이 나고 자랐던 평안북도 구성군 또는 정주군 일대 청천강 풍경이었을 테지만, 평화로운 이상향으로서 드들강 풍정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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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줄기가 화순 이양면에서 시작된 지석강은 나주시 금천면 신가리에서 영산강 본류와 합류하는, 총연장 55km 남짓한 물길이다. 이 강변에는 칼이나 도끼를 갈 때 쓰는 숫돌(砥石)과 같은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많아 지석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편찬된 지리지인 『여지도서』(1757년~1765년)의 능주목과 나주목의 <산천> 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1861년)의 제18첩에 이 강을 '지석천(砥石川)' 또는 '지석강'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호남읍지』 제9책에 수록된 전라도 편의 「남평현 읍지」(1895년 3월 편찬)
능주를 지날 때에는 충신천(忠臣川), 약 4km 정도 남평을 지나면서는 드들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구간 지명 사례는 부여 인근을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이라 하고, 장흥읍을 끼고 도는 탐진강을 예양강이라고 부르는 등 전국적으로 꽤 있다.
이야기로 전하기를, 남평 현감이 지석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둑을 쌓았는데, 큰비가 내리기만 하면 둑이 휩쓸려 농경지는 물론 마을까지 수해가 거듭되었다고 한다. 현감의 꿈에 한 동자가 나타나 "고을에서 '드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를 골라 둑에 묻고 쌓아야만 무너지지 않는다"는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현감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효심이 깊고 착한 '드들이'를 강둑의 주춧돌(인중석)로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처녀를 묻고 제방 공사를 한 후로는 큰 홍수가 나도 둑이 잘 견디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드들이'의 넋을 기리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 강을 '드들이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는 곳곳에 전한다. 중국 만리장성 축조와 맹강녀(孟姜女) 설화, 일본 마쓰에 성(松江城)의 무희 전설, 그리고 국내에서는 경주 월성 서쪽 성벽 바닥층에서 발굴된 5세기 신라 시대 성인 남녀와 20대 여성의 인골, 경북 상주 공갈못(공검지) 축조 설화, 고려 충혜왕의 개경 궁궐 축조 괴담, 장흥 부산면의 어인보 축조 설화 등 외에도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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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지역의 난제였던 건축과 치수의 어려움, 그 과정에서 동원된 백성들의 부역과 그로 인한 사고를 공동체를 위한 희생으로 미화하면서 제의적 정화 장치로 삼았다. 공동체의 중심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 주변부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이런 제의는 구성원이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내용에 신성성이 가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술적·신화적 통치술은 주변부의 희생만을 강요했다는 .에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스토리텔링이라고 여겨진다. 영암 소바우 마을(우암마을)의 설화에서처럼 소나 말 등으로 희생물을 대체하였더라면 어떠했으려나 싶다.
토목술이 발달하지 않은 농경사회에서 방조제 축조를 비롯한 치수는 통치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지석천이 자주 범람하니 홍수 때마다 주변 지역은 진들(질펀한 들)이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대 현감 우성(禹成, ?~1427)은 지석천(드들강) 유역에 최초로 제방과 보를 축조하였다. 인근에 소나무를 심어 '십리장송(十里長松)' 솔숲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1427년 전 현감 우성이 사망하자 세종은 예조의 요청을 받아들여 상가에 부의할 것을 허가하였다(禮曹啓, "故南平縣監禹成, 請依例致賻" 從之.-『세종장헌대왕실록』 9년 4월 19일)는 기록이 있다.
#동사리 톺아보기
조선시대 남평현 관아의 핵심 공간인 동헌의 건물 명칭은 시대에 따라 선칠당(宣七堂), 근민당(近民堂), 남휘당(南翬堂)으로 바뀌었지만, 국왕을 상징하는 위패인 전패(殿牌)를 모시고 사신을 접객하던 객사는 영평관(永平館)이란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관아 객사 명칭은 광주 광산관, 나주 금성관, 보성 산양관, 고창 모양관 등에서 보듯이 대부분 그 지역의 별칭을 붙인다. 『군지』나 『읍지』 등 지역사 자료집의 편재를 보면 동헌이 중심 건물임에도 객사를 우선하여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객사 중앙 정청에 모셔진 전패에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 관원들은 망궐례(望闕禮)를 올려야 했던 신성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쪽을 동익헌(東翼軒) 또는 동사(東舍)라고 하고, 서쪽을 서익헌 또는 서사라고 하였는데, 그 지역을 출장 중인 문관과 무관이 각각 머무는 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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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관리와 이름있는 사대부들도 이용이 가능하였다.
남평읍 동사리(東舍里)는 '동헌(東軒)과 객사(客舍)가 있던 자리'이다. 오랜 기간 남평의 행정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1895년에 편찬된 『남평현읍지』의 호구 기록을 살피면, 5,330 가구에 인구는 20,202명으로, 남자가 9,450명, 여자는 10,752명이었다. 19세기 후반 영역과 현재는 다르겠지만, 오늘날 남평 인구는 11,548명이다.
동헌과 객사, 그 관문이었던 망미루(望美樓) 등 관아 건물은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남평현 관아가 결정적으로 해체된 시기는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 초반 사이로 추정된다. 이후의 사진 기록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의 전폐가 모셔진 객사는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통제되었을 것이다. 남평은 1908~9년 사이 함평 출신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본명 심수택, 1871~1910)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장담원, 죽곡면, 거성동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최대의 전과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1910년대에는 관아에 일본 헌병경찰이 주둔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보통경찰의 주재소로 쓰이기도 하였다. 관아 건물은 이후 일본식으로 개축되었거나 남평공립보통학교(현 남평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부분적 해체 또는 철거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1919년에 촬영된 동헌(남휘당) 건물 사진에 일본식 유리창이 설치된 것을 보면 건물의 구조가 이미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3년 11월 남평현 객사였던 영평관. 배경으로 걸린 일장기와 참석한 인물들로 보아 일본인 학교였던 남평심상소학교 교육성과 품평회 폐회식으로 보인다.(출처 한국학호남진흥원)
#박물관이 된 교정
원형은 사라졌지만 남평현 관아의 흔적은 남평초등학교 교정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평초등학교와 남평도서관 뜰에는 동헌 자리임을 알리기 위한 '남평현 동헌 유지비(東軒 遺址碑)' 외 영세불망비, 선정비, 공덕비 등 10여 기의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과거 남평현 수령들의 공덕을 기르는 비가 대부분이다. 현감 외에도 '관찰사 민공정식 영세 불망비(觀察使 閔公正植 永世 不忘碑)'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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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식(1841~?)은 남평 현감을 지낸 민영직(閔泳稷, 재임 1875.3.~1876.8.)의 아들로서 명성황후 가문의 유력한 외척이었다. 1891년 전라도 관찰사 시절 왜구들이 제주도에 침입하여 살육을 저지른 사건에 대해 이를 저지해달라는 금제책(禁制策)을 건의했던 수준, 남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건립 연대가 광서(光緖) 18년 임진(1892년) 3월인 걸 보면 그가 이조판서로 이임한 무렵, 아마도 민씨 세력들에게 잘 보이려는 남평 아전들이나 토호들이 건립한 환심성 작품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그 밖의 공덕비들은 남평향교나 지금은 봉황면에 속한 신동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조형물은 남평도서관 앞 명상의 숲에 건립된 '의사 이산 윤승현 기적비(義士 伊山 尹昇鉉 紀蹟碑)'이다. 이산 윤승현(尹昇鉉, 1910~1989)이 세상을 떠난 해에 건립된 것인데, 2003년에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 시설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하> 편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1919년 남평현 동헌 람휘당에서 찍은 기념 사진(출처 한국학호남진흥원)
좀 색다른 일본식 조형물 2。도 보인다. 일본 사찰이나 신사에 가면 볼 수 있을 법한 석등 형태로서, 구로즈미 마사오와 부인 치요코가 기증(奇進 黑住 正雄 仝 千代子)하였다는 문구가 새겨진 기증석이다. 알려진 바대로 구로즈미 가문은 일제강。기 나주 전역에서 토지 약탈과 미국 수탈을 자행한 일본인 최대 지주 집안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구로즈미 이타로(黑住 猪太郞, 나주 거주 기간 1905~1945)인데 그는 구로즈미 농장은 물론 가마니 생산 회사와 수리조합 등 여러 민간 직책을 맡으면서 나주·영산포 일대 논밭 330만 평의 토지를 소유했던 자이다. 영산포가 그의 본거지였지만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구로즈미 마사오는 남평지역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영산포의 구로즈미 가옥은 현재 '타오르는 강 문학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본관 현관 앞 화단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 자리였던 이 일대는 고려시대에 육룡사(六龍寺)라는 절이 운영되었다고 한다. '동사리 석등'이라고 불리는 이 석등은 화려한 조형미나 섬세한 조각 기법은 보이지 않지만 소박함과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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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량 넓은 수행자거나, 백성들을 살피는 목민관이거나, 너털한 서당 훈장 같은 상이다. 고려시대에는 사찰, 조선시대에는 관아 자리, 근대 이후에는 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이 터전은 지역 문화를 꽃피우는 중심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미 가 버린 것들과 앞으로 다가올 것들이 만나는 곳, 그곳에는 학교가 있다.
드들강변에 새롭게 복원된 망미루
#망미루
최근 나주시는 남평읍 영산강변에 남평현 망미루(望美樓)를 복원하였다. 오는 10월 15일 현판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건물이 완공되어 마지막 。검 단계인 망미루는 팔작지붕 양식으로 드들강 풍경을 넉넉히 조망할 수 있도록 조성된 2층 누각이다.
관아의 정문이었던 망미루는 관원들의 출입, 공문서 전달, 공식 행사나 의례를 진행하는 상징 공간이다. 복원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연고성이 낮은 남평읍 외곽 지역이다. 위치 선정 단계에서 여러모로 검토했겠지만,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경복궁 관문인 광화문처럼 남평의 나들목에 조성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고 돌아 / 여산 석(礪山 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 삼천리(三千里) 좋은 경(景)은 호남(湖南)이 으뜸이라.
전라감사를 두 차례나 지낸 낙서 이서구(洛瑞 李書九, 1754~1825)가 작시했다는 「호남가」의 끝부분이다. 조선 후기 전라감영에 소속된 54개 지명을 중의적으로 쓴 노랫말이다. 제주도까지 포함하여 호남 전역을 순회하는 방식이다. 「호남시」나 「호남가」로 불리는 사설은 몇 개 더 있다. 비록 언어 유희적인 내용이지만 이서구의 지역 사랑, 관심 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창 오동나무마을 출신 경주인(京主人)으로, 19세기에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음악가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는 여기에 곡을 붙여 판소리 '호남가'를 완성하였다. 이후 소리꾼들이 널리 부르면서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남평루가 망미루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와 드들강 주변 산천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시를 짓고, 노래하기를 바란다.
일제강.기 남평교육의 두 갈래, 한국인과 일본인을 위한 교육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하>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선명완 소장
판식이 진행될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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